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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이 책의 의도와 사용법

Hanyang University in Korea

왜 또 하나의 경제학원론인가

서점의 경제학 코너에는 이미 훌륭한 원론 교과서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새로 쓴 이유는, 지난 20년 사이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크게 달라졌는데 원론 교육은 그 변화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경제학은 데이터의 학문입니다. 2021년 노벨경제학상이 자연실험 방법론(카드·앵그리스트·임벤스)에 돌아간 것이 상징하듯, 현대 경제학의 중심은 "그럴듯한 이론을 세우는 일"에서 "그 이론이 실제 데이터와 부합하는지를 엄밀하게 검증하는 일"로 옮겨 왔습니다. 연구자들은 최저임금 인상, 담뱃세 인상, 국경과 분단 같은 현실의 사건을 실험실 삼아 인과관계를 추적하고, 공개 데이터와 코드로 누구나 결과를 재현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많은 원론 수업은 여전히 칠판 위의 곡선을 암기하는 데서 멈추고, 학생이 실제 데이터를 손에 쥐어 보는 것은 대학원에 가서야 일어나는 일로 미뤄져 왔습니다.

이 책은 그 순서를 뒤집습니다. 첫 장의 첫 그림부터 마지막 장까지, 이 책의 모든 실증 그림은 독자가 직접 실행할 수 있는 코드로 만들어집니다. 매디슨 프로젝트, 세계은행, Our World in Data, Penn World Table 같은 무료 공개 데이터를 인증키 없이 그대로 내려받으므로, 여러분의 노트북이나 Colab에서 클릭 몇 번이면 책과 똑같은 그림이 다시 그려집니다. 교과서의 주장을 믿는 것이 아니라 검증하는 것 — 그것이 이 책이 가르치려는 첫 번째 습관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입니다. 우리는 세계 경제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례 — 반세기 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나라 — 에 살면서도, 정작 미국 교과서의 번역 사례로 경제학을 배우는 일이 많습니다. 이 책에서는 한국의 압축성장, 2015년 담뱃세, 한국의 지니계수, 원/달러 환율과 1997년 외환위기가 장식용 '한국 사례 상자’가 아니라 본문의 핵심 데이터로 등장합니다.

이 책의 네 가지 원칙

이 책의 모든 장은 다음 네 가지 원칙 위에서 쓰였습니다.

첫째, 질문이 먼저고 데이터가 그다음이며 모형은 그 뒤에 옵니다. 각 장은 “왜 어떤 나라는 부유한가”, “담뱃값이 80% 올랐는데 왜 사람들은 계속 피우는가” 같은 실제 질문에서 출발해, 그 질문에 관한 실제 데이터를 먼저 들여다본 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서 모형을 도입합니다. 이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진 CORE Econ 프로젝트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모형은 암기 대상이 아니라,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하는 지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모든 실증 그림은 재현 가능합니다. 코드는 본문과 분리된 부록이 아니라 본문의 일부입니다. 데이터 출처는 전부 무료·무인증 공개 자료이고, 각 장 상단의 Colab 배지를 누르면 설치 없이 브라우저에서 바로 실행됩니다. 그림 하나하나가 “어느 데이터로, 어떤 계산을 거쳐” 나왔는지 숨김이 없습니다.

셋째, 현대 실증경제학의 감각을 원론 수준에서 미리 심습니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구분, 자연실험과 이중차분(2장),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하는 시장의 가격 발견(3장), 지수의 구성(8장의 HHI, 9장의 지니계수), 회귀로 추정하는 오쿤의 법칙(14장) — 대학원에서야 만나던 도구들의 직관을, 수식 부담을 최소화한 형태로 처음부터 함께 배웁니다.

넷째, 혼자 읽어도 완결되는 교과서를 지향합니다. 각 장은 학습목표 → 본문 → 요약 → 핵심 용어 → 연습문제(10문항 이상)의 동일한 골격을 갖추고, 본문 중간중간 위대한 경제학자(개념의 기원), 심화(더 깊은 수학·논리), 흔한 오해(자주 틀리는 지점), 생각해 봅시다(토론 질문) 상자가 층위를 이룹니다. 수식이 부담스러운 독자는 심화 상자를 건너뛰어도 본문의 논리가 끊기지 않도록 설계했습니다.

목차는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가

이 책의 차례는 전통적인 교과서(맨큐류)의 골격과 CORE Econ의 정신을 절충한 결과입니다. 그 절충의 논리를 밝혀 두는 것이 독자와 강의자 모두에게 유용할 것입니다.

1장이 수요·공급이 아니라 '역사’로 시작하는 이유. 대부분의 원론은 희소성의 정의나 수요·공급 곡선에서 시작합니다. 이 책은 대신 서기 1000년부터 2022년까지의 1인당 소득 그래프 — ‘하키 스틱’ — 를 첫 그림으로 놓습니다. 경제학이 답하려는 가장 큰 질문(왜 어떤 나라는 부유한가, 성장은 어디서 오는가)을 먼저 보여 주어야, 이후에 배우는 모든 도구가 "무엇을 위한 도구인지"가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CORE Econ이 개척한 구성이며, 한국 독자에게는 자기 나라의 압축성장이 바로 그 그래프의 가장 가파른 선이라는 점에서 특히 강력합니다.

2장에 방법론이 오는 이유. 데이터를 앞세우는 책일수록, 데이터에 속지 않는 법을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모형과 가정의 역할, 유인의 원리, 그리고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구분(누락변수·역인과·선택편의)과 자연실험이라는 해법을 2장에 배치한 것은, 이후 열세 개 장에서 등장할 모든 실증 그림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안경을 먼저 씌우기 위해서입니다.

3~9장: 미시경제학 — 나무를 본다. 시장이라는 무대(3장 수요·공급)에서 출발해 반응의 크기를 재는 자(4장 탄력성)를 얻고, 무대 뒤의 두 주인공 — 소비자(5장)와 기업(6장) — 의 선택 원리를 파헤친 뒤, 시장의 구조가 완전경쟁(7장)에서 독점·과점(8장)으로 달라질 때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임금과 소득분배가 결정되는 요소시장(9장)까지 나아갑니다. 순서의 원칙은 하나입니다: 각 장은 바로 앞 장의 도구를 딛고 올라섭니다. 탄력성 없이는 조세 귀착을 논할 수 없고, 비용곡선 없이는 완전경쟁 기업의 공급을 도출할 수 없습니다.

10장이 미시의 종착역인 이유. 시장 실패(외부효과·공공재·정보비대칭)를 미시의 마지막에 둔 것은 의도적입니다. 3~9장에서 시장이 "언제, 왜 잘 작동하는가"를 충분히 이해한 뒤에야, "언제, 왜 실패하는가"와 정부의 역할이 공정하게 평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장 예찬도, 시장 불신도 아닌 — 조건을 따지는 사고가 이 책이 기르려는 태도입니다.

11~15장: 거시경제학 — 숲을 본다. 나라 경제 전체의 측정(11장 GDP·물가·실업)에서 시작해, 장기의 성장(12장 솔로우 모형)과 화폐·금융(13장), 단기의 경기변동과 안정화정책(14장)을 거쳐, 무역·환율·국제수지의 개방경제(15장)로 끝납니다. 그리고 15장의 비교우위와 무역의 이익은 1장의 질문 — 왜 어떤 나라는 부유한가 — 으로 되돌아오는 수미상관의 구조입니다. 나무(미시)를 먼저 보고 숲(거시)을 보되, 숲의 끝에서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한 줄 요약
제1부 기초1 경제문제와 경제체제하키 스틱: 성장이라는 큰 질문
2 경제학의 본질모형·유인·인과: 데이터에 속지 않는 법
3 시장의 작동 원리수요·공급과 정보로서의 가격
제2부 소비자와 기업4 탄력성과 시장반응의 크기, 조세의 귀착
5 소비자 선택예산제약·효용극대화·행동경제학
6 생산과 비용비용곡선과 규모의 경제
제3부 시장구조와 분배7 완전경쟁시장가격수용자와 일물일가
8 불완전경쟁시장독점·과점·게임이론·HHI
9 생산요소시장임금·최저임금·지니계수
10 시장 실패와 정부외부효과·공공재·정보비대칭
제4부 거시경제학11 거시경제학의 기초GDP·물가·실업의 측정
12 장기 경제성장솔로우 모형과 성장회계
13 화폐와 금융신용창조·중앙은행·화폐수량설
14 경기변동AD-AS·필립스곡선·오쿤의 법칙
15 개방경제무역·환율·국제수지 — 그리고 다시 1장으로

이 책을 읽는 법

이 책 다음에는 — 경제학 공부의 테크트리

원론은 지도이지 목적지가 아닙니다. 이 책을 마친 독자가 어디로 가면 좋을지, 경제학 커리큘럼의 표준적인 "테크트리"를 그려 둡니다.

0단계 — 도구부터. 중급 과목의 언어는 수학과 통계입니다. 경제수학(미분·최적화·간단한 동학)과 통계학(확률·추정·검정)을 원론 직후 또는 병행으로 이수하는 것이 이후 전 과정의 속도를 결정합니다. 이 책처럼 코드로 공부하고 싶다면 파이썬 데이터 분석(pandas·시각화)을 함께 익히세요.

1단계 — 세 개의 기둥. 경제학 전공의 코어는 세 과목입니다. 미시경제학(중급) 은 이 책 3~10장의 논리를 미적분 위에서 다시 세우고, 거시경제학(중급) 은 11~15장의 모형(IS-LM, 솔로우 등)을 정식으로 다룹니다. 계량경제학은 2장에서 맛본 "데이터에서 인과를 읽는 법"을 회귀분석이라는 정식 도구로 배우는, 현대 경제학도의 필수 언어입니다.

2단계 — 관심을 따라 응용 분야로. 이 책의 어느 장이 가장 재미있었는지가 좋은 나침반입니다. 7·8장(시장구조)이 흥미로웠다면 산업조직론게임이론, 9장(임금·불평등)이라면 노동경제학, 4장의 조세와 10장의 정부 역할이라면 재정학(공공경제학), 5장의 심리와 선택이라면 행동경제학, 13장이라면 화폐금융론, 15장이라면 국제무역론·국제금융론, 1·12장의 성장이라면 경제성장론·개발경제학 그리고 경제사로 이어집니다.

3단계 — 데이터 시대의 무기. 계량경제학 다음에는 인과추론(자연실험·이중차분·회귀불연속·RCT — 2장에서 예고한 신뢰성 혁명의 본편)과 머신러닝의 경제학 응용이 기다립니다. 연구자뿐 아니라 정책기관·금융·테크 기업의 데이터 분석 실무에서도 이 조합(경제학적 사고 + 인과추론 + 코드)이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어느 길로 가든, 이 책에서 기른 습관 — 큰 질문에서 출발하기, 데이터를 먼저 보기, 모형을 비판적으로 쓰기, 그리고 모든 주장을 재현 가능하게 만들기 — 이 여러분의 나침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준하 한양대학교